2011년 12월 13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사망하자 정부는 최고급인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는 국가경제에 이바지 한 공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2년 2월 24일 포스코 이사회는 박태준 명예회장 유족에게 공로금 40억 원을 지급하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TV조선은 2014년 4월 방영 예정으로 박태준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불꽃속으로>의 제작을 발표했다. 여기서 박태준은 가난과 좌절이라는 난관을 딛고 경제발전과 성공을 이뤄낸 영웅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국가의 예우 → 유족에 대한 포스코의 보상 → TV 드라마 주인공까지. 과연 박태준에 대한 영웅화는 합당할까.

박태준 영웅화 합당한가

'박태준이 5·16 군사쿠데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많다. 그러나 이 주장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 박정희가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전날 박태준에게 가족을 맡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쿠데타 성공 후 박태준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과 상공담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대한중석 사장을 거쳐, 1968년 4월 포항제철 사장을 맡았다.

5·16이 혁명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실체어(實體語)가 아니라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우리의 현대사는 민주화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4·19로 시작됐지만, 5·16으로 뒤집어졌다. 이후 4·19 경향성(민주주의)의 성장, 5·16 경향성(권위주의)의 저항, 그리고 4·19 경향성(민주주의)의 반격을 거치면서 발전해오고 있다. 민주주의가 법률과 정부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의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5·16은 일정기간 민주주의를 지연시킨 쿠데타가 분명하다.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5·16 지지 세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내세운다. 결과로 원인을 구축하는 미화작업이다. 박정희는 1960년 5월 8일, 1961년 4월 19일, 1961년 5월 12일, 1961년 5월 16일에 걸쳐 네 번의 쿠데타를 계획했다. 당시 그가 내세운 외적 이데올로기는 "민주당 정권의 부정부패로 인한 국내질서의 혼란과 빈곤"이었다. 그러나 4회의 쿠데타 시도가 증명하듯이, 그의 목적은 권력 장악일 뿐이었다.

우리나라 종합제철소 건설이 박정희와 박태준의 아이디어로 알려져 있다. 심각한 왜곡이다. 종합제철소 건설은 자유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가 추진해 온 사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두 정부는 외자조달 실패로 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역시 1966년 12월 미국·서독·영국·이탈리아·프랑스 등 5개국의 8개 회사가 참여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구성했지만, 세계은행 (IBRD)의 '종합제철 사업은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로 인해 1969년 4월 투자불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대안으로 박정희 정권은 농어업 분야에 사용하기로 돼 있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기로 했다. 포항제철 건설에 2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이들 중 대일청구권 자금 7370만 달러, 일본 수출입은행 차관 5000만 달러, 내자 7630달러였다. 여기서 대일 청구권 자금과 일본차관은 "식민통치로 발생한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 국민 사이의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대가로 받은 무상자금과 차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박태준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보상은 엄밀히 말하면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자손, 위안부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 농업인에게도 함께 돌아가야 한다.

한일협정(1965년 2월 20일 가조인, 12월 18일 효력 발생)은 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기본조약 ②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③ 한일 어업협정 ④ 한일 재산 및 청구권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⑤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③은 양 국민의 재산, 양국 및 양국민간 청구권문제 소멸과 개별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① 총 3억불 무상자금(일본국가 생산 및 일본인 용역) 10년간 균등제공 ② 총 2억불 공공차관 10년간 균등제공 ③ 총 3억불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 받기로 했다.

한일협정은 박태준의 작품이다. 박태준은 박정희의 지시로 약 8개월 일본에 머물면서, '한일협정' 전반에 대한 물밑작업을 진행했다. '한일협정'은 식민시대와 관련된 모든 청구권을 소멸시키고, 12해리 어업전관수역 외 모든 수역에 일본어민의 조업을 허용한 굴욕적 협정이었다.

박태준이 사망했을 때 유족 대변인을 맡은 김명전 삼성 KPMG 부회장은 "박태준 명예회장은 최근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큰딸 집에서 지냈으며, 자식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왔고, 입원비조차 감당하지 못했으며, 자신 명의의 재산은 단 한 푼도 없고, 포항제철부터 포스코까지 단 1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박태준을 청렴의 리더십으로 극찬하기까지 했다. 

과연 그럴까? 1993년 3월 포항제철 계열사 및 협력사로부터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검찰에 기소되었다(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재판 종결). 2000년 1월 총리로 발탁되었지만 재산 축소신고,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자금세탁으로 5월에 물러났다. 전자를 문민정부의 보복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후자를 의혹 수준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총리 낙마 후 아현동 자택을 매각한 돈 14억 원 중 10억 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한 의미가 무엇일까?

박태준의 재산은 1993년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약 360억 원으로 확인됐지만, 1994년 공직자 재산공개 때는 35억 원으로 축소 신고했다. 축소 신고한 재산 가운데 30여억 원은 포항제철 회장시절 32개사의 계열사 및 협력사로부터 수뢰한 것이다(1993년 박태준 수뢰사건 검찰수사 참조, 총수뢰액 56억 원). 2000년 5월 17일 서울행정법원 행정 2부는 "박태준 총리가 세금을 적게 낼 목적으로 중구 오장동 건물 등 부동산 네 건을 명의신탁 했으며, 또한 다른 부동산 두 건의 경우도 공직자로서 다량의 재산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질 경우 입을 불이익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명의신탁 했다"고 판결했다. 그 많던 박태준의 재산은 '명의신탁'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박태준의 능력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와 민중이 바친 생명과 피의 대가다. 박태준은 청렴의 대명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포스코 설립자, 결단의 리더십, 청렴의 대명사라는 찬사가 따라다닌다. 객관적 시각으로 박태준을 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포스코의 역사도 바로알아야 한다.